1. 언제 : 2007년 6월 23 2. 어디 : 치악산 3. 코스 : 구룡사-사다리병창-비로봉-입석사-황골 4. 참석 : 29명 5. 후기 출발장소인 도청에 나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올사람은 다왔는데 먼저도착해야 될 버스가 없다. 하늘고속사장이 잊어버렸단다. 30분을 기다린후 출발
차가 도착 구룡사 주차장에 도착 산행준비를 마치고 산행을 시작한다. 국립공원 입장료는 없어졌는데 사찰입장료가 예전보다 비싸 가격차이가 별로 없다.
주차장에서 구룡사 가는길의 숲길이 정말 아름답다.
구룡사다.
영서의 대찰 구룡사(龜龍寺)는 풍수지리적으로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바다의 용이 구름을 풀어 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인 치악산에 구룡사는 서기668년(신라 문무왕8년)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셨으며 나말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중의 하나로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전설을 보면 아득한 옛날이라고 할 천삼백년 전의 일이다. 메마른 품이 학같은 늙은 스님 한 분이 원주지방에 찾아와 절자리를 두루 고르고 있다가 관서우 거산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은 무착대사라고도 하고 의상조사라고도 하나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원주서 치악산을 향해 육십여리 길을 가던 대사는 그 곳에서 다시 시오릿길을 더 가서 지금의 구룡골에 멎었다. 스님이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질은 데다가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웠다. 절을 세울만한 곳이군. 그러나 대웅전을 세우려면 저 연못을 메워야겠는데.....? 대사는 발을 옮겨 연못가로 갔다.
그때 그곳에 있던 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연못을 메우자니 모처럼 용이 사는 것을 쫓아야겠고 난감한 일이구나.......? 대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연못에 살던 용들이 들었다. 그리고는 대사를 향해 "대사님이 벌써 우리를 내어 쫓을 생각을 하시나 우리도 마음이 안놓여 살수가 없오, 대사와 우리가 서로 내기를 해서 우리가 이기면 대사가 이곳에 절을 못 지을 것이요, 지면은 선뜻 자리를 내어드리리다." 했다. 대사가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느냐?" 하느냐" " 그것은 잠시 두고 보시면 압니다." 고 대답한 용들은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우박같은 비를 쏟아놓았다.
이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고 대사 또한 물속에 빠져 죽는가 했으나 대사는 태연하게 앉았다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비를 퍼부은 용들은 이만하면 대사가 물속의 귀신이 되었겠다 생가하고는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사는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홉 마리의 용들이 다 내려오자 부시시 일어난 대사는 "너희들의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것인즉 너희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 보아라." 하고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 속에 넣었다. 얼마 안있어 연못에서는 더운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큰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뜨거움을 참다못한 용들은 뛰쳐나와 한다름에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아홉 마리의 용 가운데 한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서 미쳐 달아나지를 못하고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용들이 달아나자 대사는 못을 메우고 지금의 구룡사 대웅전을 지었다. 한편 뜨거운 물에 쫓겨 달아나던 용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구룡사 앞산을 여덟 개의 골이 치어있으며, 이때 미쳐 도망하지 못한 눈먼 한 마리의 용은 구룡사 옆에 있는 용소에서 지난 왜정때까지 살다가 그해 여름 장마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또한 지금 아홉구(九)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게된 연유는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쇄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 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 즈음 한 스님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는 더욱 적어지고 거찰(巨刹 : 큰절)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 때 어느날 도승 한 분이 또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지요?"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동강으로 내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이 이미 죽었지만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자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지금 현판에 새겨진 대로 치악산 구룡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구룡소여름이라 그런지더욱더 멋지게 보인다.
구룡사에서막영장으로 가는 숲길..데이트하기 좋은 코스라더니이래서 그런가..
노루발풀
세렴폭포당초 구룡사 큰골로 올라갈 계획이었으나폭포에 도착해서 보니 영구폐쇄된 등산로다.힘든지 알지만 사다리 병창길로 방향을 잡는다.
사다리병창이 암벽군은 원래 말등바위라고 불렸으나, 1973년 치악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고 탐방로를 정비하면서 여기에 지금처럼 철난간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많이 설치했다고 하여 사다리병창이라고 부르며, 병창은 영서방언으로 '벼랑, 절벽'을 뜻한다.
세렴폭포에서 사다리병창길로 오르는 등산로 초반부터 계단이 사람을 잡는다.장마기간이라 습기가 많아서 그런지오늘은 더욱더 힘들고땀도 많이 난다.
드디어 정상 바로 밑 전망대다.온산에는 털개회나무의향기가 우리를 반긴다.
털개회나무정향나무미스김라일락구분하는 지는 잘 모르지만초보인 내눈에는 전부같은 꽃 같다.
우리가 올라온 계곡과 능선길이다.
1288m 치악산 최고봉인 비로봉이다.단체사진 찍고점심을 먹는다.
비로봉 정상에 있는표지석
사다리병창길 시작지점에서우측계곡길을 따라 오르면이곳으로 올라서나 보다.
헬리포터장에서본비로봉
내림길은주능에서 입석사로 해서황골이다.
입석사의 모습
입석대
무더운 날씨에강원도에 있는 치악산을 아무런 사고 없이 산행을 마쳤습니다.함께하신 모든분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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