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여행

`92 루프가르사르 원정보고서

by 에코j 2010. 12. 28.


베이스캠프까지 짐수송4급 바위지대에서 고생하고고정자일부족으로 등반차질
벽지대에 이어지는 끊없는 리지제3캠프와 연락 끊긴두대원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서 25간의 긴 버스 여행 끝에 등반기점 마을인 파수(Pasu 2,500m) 마을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다음날 아침 일찍 심샤르 마을에서 포터수배를 한후 쿤자랩 패스(4,73m)까지 고도를 올렸다. 이어 6월26일, 55명의 포터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카라반에 들어갔다. 주르주르, 튜트를 거쳐 루프가르사르 야즈 빙하 하단부인 야즈미(3,400m)에 도착했다.

우리가 예정한 빙하지대의 베이스 캠프에 대해 아는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27일 새벽 3시, 나는 정원택 대원을 데리고 먼저 출발했다. 해발 3,800미터 양치기마을에 도착하니 루프가르사르의 중앙봉과 서봉정상, 우리의 목표인 동봉의 등반 루트가 뚜렷하게 조망되었다. 거기서 봐도 등반이 만만치 않게 보였다. 양치기 마을에서 부터는 양떼들이 다니던 길이 많아 여러법 길을 잃었으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포터선두 그룹과 거의 비슷하게 우리는 일본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맑은 물이 흐르고 파릇파릇한 초지로 형성된 기분좋은 캠프지(4,100m) 였다.

전날까지도 포터리더인 사다와 정부연관관 입회하에 몇 번이나 다짐 했건만 그들은 우리 원정대 베이스캠프(4,250m)까지는 안가겠다고 버텼다. 하는 수 없이 나 혼자서 먼저 출발을 했다. 일단 가본 후 상황을 봐서, 포터들을 이동시키기로 했다. 그냥 되돌려보내든가 아니면 돈을 더 얹어 주던가.

루프가르사르 야즈 빙하지대와 좌측능선에서 위험스럽게 흘러내리는 너덜지대 사이로 조심스럽게 그리고 신소하게 전진해서 우리팀 베이스캠프윤관을 잡은 나는 무전기를 이용하여 포터들의 하산을 명했다.

고소포터를 고용하지 않은 우리는 베이스캠프로 물자수송을 했다. 그리하여 6월 28일 어렵게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해발 4,250m의 베이스캠프는 좌측능선에서 가끔씩 굴러 떨어지는 낙석을 제외하면 이상적인 위치였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나와 정수근 조은철 대원이 7시에 베이스캠프를 출발하여 크레바스지대 루트개척에 나섰다. 크레바스 위험 때문에 좌측능선에서 가지쳐 내린 5,000여미터의 가파른 봉을 넘어 벽 밑으로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봉우리에 올라서 내려다 보니 더욱 거대한 크레바스 지대가 펼쳐저 있었다. 정수근대원을 그 봉우리에 대기하게 하고 나는 조은철 대원과 안자일렌을 하여 본래의 우측크레바스 지대로 접근을 시도했다.

4급의 바위지대서 고전하고

흡사 미로 찾기 게임 같았다. 봉우리에 대기하고 있는 정대원이 무전기를 이용, 길을 인도해 주는대로 전진하여 그 무시무시한 크레바스 지대를 통과하여 벽밑에 도착했다. 곧이어 정수근과 일본대 베이스캠프로부터 올라온 김영재 대원과 합류했다. 쾌청하던 날씨가 변하여 눈발이 비쳤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ㅎ에 ㅇ리 4명은 벽등반을 시작했다. 정수근 대원이 리드하여 10여미터의 경사진 심설지대를 지나 암벽지대를 등반했다. 낙석지대를 피하느라 애섰지만 건조한 카라코람의 기상에 풍화된 암벽은 상태가 매우 불량했다. 경사도 60~70도에 130m 고정자일을 설치한 후 베이스캐므로 귀환을 서둘렀다. 열심히 아래의 일본대 베이스캠프에서 우리의 베이스캠프로 짐수송을 했던 대원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모두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다음날 영재, 수근이가 벽밑에서 부터 등반을 시작했고 조은철 대원은 주마링으로 고정자일 등을 지원했다. 나는 정원택대원과 벽등반을 위한 데포캠프를 벽밑 4,450m 지점에 설치했다.

2피치등반 좌측의 꿀르와르가 등반하기 쉬워보였으나 낙석, 낙빙 때문에 우측벽으로 붙었다. 총 3피치까지 등반을 완료했을 때 모두 360미터의 고정자일이 소요되었다. 7월2일 이날부터 눈과 바위가 교대로 나타나는 지대가 이어졌다. 이른 바 믹스 크라이밍을 해야 했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심했다. 그러나 오후 늦게 영재, 수근이가 200여미터 이상 되는 경사도 45~60도 정도의 잘 크러스된 설사면 등반을 무사히 끝냈다. 벽등반 시작부터 궂은 날씨에 시야가 자주 막혔기 때문에 고배율(30배) 만원경으로도 아래서는 감잡기가 어려웠다. 명암이 혼합된 암설벽에 붙어 있는 등반자를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날까지도 나는 실제로 등반후에도 우리가 어느 위치까지 등반 했는지 알지 못했다. 포라이드 즉석 카메라를 준비했으나 사진이 너무 작어 등반루트를 판독하는데는 어려웠다.

이날 우리는 등반고도 약4,70m 제1캠프 예정지까지는 200~300미터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고 있는 고정자일의 잔량은 불과 45미터였다. 제1캠프에서 제2캠프 구간은 고정자일이 약간밖에 필요치 않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제2캠프에~3캠프 구간이었다.

3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30Cm 정도쌓여 있었다. 조은철 대원이 고정자일 1동을 가지고 5시30분 베이스캠프를 출발, 데포캠프의 영재 수근과 함께 제1캠프까지 등반을 완료했으나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오전 9시 세대원이 데포캠프에 합류하여 눈보라가 치는 날씨속에서 루트개척 및 고정자일 교체작업을 시작 했으나 오후 8시까지 고작 150미터 고도를 높이는데 그쳤다. 해발 4,850미터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밤늦게 까지 힘든 하강을 한 3명의 대원을 베이스캠프로 하산시키고 부족한 고정자일을 구하기 위해 쿡인 케리안을 이슬라마바드로 출발시켰다. 서울시 연맹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고정자일 2동이 이슬라마바드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8~10일이면 다시 베이스캠프로 귀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간동안 우리는 제2캠프를 설치하고 장비와 식량까지 제2캠프로 수송키로 했다.

7월5일 우리 원정대에게 인내와 고통을 안겨주던 제1캠프(5,150m)벽등반이 완료되었다. 오후 5시 30분, 7일간의 힘든 등반을 마친 영재와 수근이가 나이프리지에 서서 피켈을 흔들어 댓다. 5,150미터에 위치한 삼각형상 벽면의 끝부분으로 이른 바 날카로운 칼날능선상이었다.

다음날 정원택대원과 5~6인용 텐트, 스노바, 눈삽, 식량 등을 가지고 다시 제1캠프로의 벽등반을 시작했다. 장시간의 힘든 주마링 후에 제1캠프 사이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2시간 정도 교대로 나누어 얼음을 깎았지만 겨우 2~3인용 텐트 한 동을 설치할 정도밖에 안 되었다.

서쪽으로 10여미터 콜로 내려가 제2캠프로의 루트를 살폈다. 4급이라고 알려진 검은 바위였다. 초입은 60~80도 경사로 등반길이가 약 200미터 정도였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이부분의 등반에서 고정자일은 바닥이 나 버렸다.

7일, 제1캠프로 올라온 김영재가 걸쳐놓다 시피해서 텐트를 설치했고 김향순, 박정순 여성대원은 벽의 중간지점인 4피치까지 식량장비를 수송했다. 오후에는 수근,영재가 4급 암벽등반을 시작하여 중간까지 50여미터 고정자일을 힘겹게 설치하고 제1캠프로 내려왔다.

다음날 김영재대원 혼자서 경사도가 조금 완만한 4급바위 상단부분에 100여미터 고정자일을 설치햇다. 그러나 리찌가 끊겼고 'L형상' 처럼 보이는 곳의 하단부에 진출했다.

제1캠프의 캠프터가 불량하여 이곳에 임시 캠프(5,300m)를 설치하기로 했다.

나는 정원택, 조은철대원과 제1캠프로, 박정순 대원은 벽의 중간지점까지 장비식량을 수송하게 됐다.

이즈음 등반이 활기차게 진행되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11일 오전 4시, 제1캠프의 김영재 대원과 앞으로의 등반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간밤에 싸락눈이 내렸지만 등반하기에는 괜찮겠다고 하면서 등반을 시작했다.

남은 등반자일은 안자일렌용 9밀리미터 45미터자일 1동과 슬링, 고정자일 등을 조각조각 연결한 걸레같은 80미터 자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제2캠프(5,700m)까지는 남은 자일을 이용해 등반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전 대원의 마음을 위축시켰다. L형상지대의 바위면과 설벽사이에 60미터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그리고 가도가도 끝이없는 리지상의 설면을 등반했다. 일본대의 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확보지점이 부량하여 종합적인 등반기술을 요하며 표층눈사태가 빈번하다"고 쓰여 있었다.

다음날 제1캠프에 있던 영재, 수근이, 제1캠프의 거주성이 불량하여 2명이 취침하기도 어려운 곳이라는 판단하에 5,300미터 지점에 텐트를 쳤다.

7월 14일, 전대원 베이스캠프에서 제1캠프, 5,300미터 캠프에 올릴 식량장비등을 체크하여 놓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무슨일 때문인지 18일이 되었는데도 쿡은 도착하지 않았다. 캠프를 떠난 지 2주일이 넘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 정원택, 김영재대원을 제1캠프로 출발시켰다. 내일이라도 쿡이 도착하면 고정자일을 받아 출발하려는 계획이었다.

19일, 정수근대원이 제1캠프하단벽에 설치되어 있던 고정자일을 400미터 철수해서 5,300미터, 예비 제2캠프로 올라갔다. 제1캠프를 기점으로 상부에 4명의 대원이, 그리고 베이스캠프에는 나와 박정순 김향순이 머물고 있었다.

이날 오후에 쿡이 도착했다. 그는 5시간 차이로 자일을 인계받지 못했다며 축제기간, 교통편 등 여러핑계를 댔다. 그런 쿡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정원택, 조은철이 2일간 보수작업으로 데포캠프, 제1캠프 구간 벽에서 철수한 고정자일을 복구시켰다. 이어 21일, 3일간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제3캠프로의 개척에 나섰다.

가파른 설면을 올라 수직 꿀르와르 우측 리지상의 설사면을 등반한다기에 나는 좌측능선이 상부로의 연결이 용이할 것 같다고 지시해줬다.

이들은 급한 설사면에 80미터 고정자일을 설치하고 평평한 설전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낮의 날씨는 한여름 날씨만큼이나 더웠고 강렬한 햇빛은 등반자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약간 좌측으로 트래버스하여 허리까지 빠지는 50~60도 설사면 등반을 끝내니 오후 4시였다. 고도는 5,900미터, 다시 제2캠프에 도착하니 오후 저녁이 되었다.

루프가르 사르 북면루트는 고정자일을 이용한 등반을 해야 할만큼 급경사가 아니면 힘든 러셀을 해야하는 구간이 계속 이어졌다.

다음날도 깊은 눈을 파헤쳐 확보지점 만들고 고정자일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150미터의 고정자일을 설치하고 다시 수영하듯 허우적 거리며 마지막 벽아래에 도착, 정수근 대원이 완벽한 프론트 포인딩 자세로 벽중간에 스노바 1개와 상단에 스노바2개로 70미터의 고정자일 설치를 완료했다.

그러고 나니 이후는 완만한 구간이 이어졌다.

좌측으로 정상피라밋 아래 있는 콜이 보였다. 그곳에서 3~4시간이면 정상 피라밋 하단부의 제4캠프 (6,450m)에 도달하게 된다. 둘은 정상피라밋의 콜을 향해 나아갔다. 베이스 캠프에서 보면 그곳은 비행접시 모양의 넓고 평평한곳(6,050m)이었다. 오후4시에 그곳에 도착한 대원들은 약간의 장비, 식량을 데포시키고 제2캠프 다시 돌아왔다.

다음날 루트 공격조는 제2캠프에 휴식차 대기했고 2차공격조인 조은철, 정부연락관이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이때 제1캠프 위의 '4급바위'를 오르던 조은철 대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베이스를 찾았다. 주마링 하던 중 고정자일이 50미터 상부에서 끊겨 내려와 있다는 것이다.

제1캠프로 하강등반하는 것이 상부로 등반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은철아 자신을 가지고 천천히 등반해라"고 지시했고 그들은 2시간 동안 낙석에 끊겨 내려온 고정자일을 상단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다.

전대원의 손에 땀을 쥐게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24일, 영재, 수근이가 제2캠프를 출발해 오후 3시 6,050미터에 텐트를 쳤다. 제2캠프~제3캠프는 하루에 도달하기에는 너무 먼거리였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부터 계속 눈이 내렸고 베이스캠프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밤새 내렸다. 조은철 대원은 제2캠프 하단부 설벽트래버스 구간에 고정자일을 200미터 설치하고 5,300미터에 대기했고 정부연락관은 제2캠프에 대기했다. 1차, 2차공격조가 악천후 속에서도 순조롭게 등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비행접시 형상(6,050m) 위의 두 대원에게서 "밤새 30여센티미터 신설로 운행이 어렵기 때문에 할루를 대기하겠다"는 무전이 왔다.

이날 나는 베이스캠프에서 '파키스탄 전지역이 구름이 끼어 날씨가 좋지 않다'는 뉴스를 들었으며 스카루드 한 마을이 산사태로 매몰되었다는 소식도 전해들었다.

7월 26일 내 생일이었다. 영재와의 무전 교신시 "상황이 조지 않은 것 같으니 제2캠프로 하강해서 1~2일후에 등반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정상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날씨는 좋아질 것 같구요. 오늘 같은날 등반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대장님 생일 선물은 내일 정상등정으로 하겠습니다"했다.

이들 두면은 오전에 출발, 9시에 정상 피라밋 하단에 도착했다. 이어 11시 "루트는 어렵지 않고 러셀하는데 힘이 많이 든다"고 알려왔으며 오후 3시 6,300미터에 도달했으며 컨디션 좋고 오락가락하는 구름이 "강한햇빛을 가려줘 등반이용이하다"고 알려왔다. 이어 오후 5시30분, 고도계 6,450미터, 캠프사이트 자리를 찾았다"고 하며 텐트를 설치하고 연락 주겠다고 알려왔다.

나는 무전교신을 끝내고 내일 정상등정을 위한 주의사항과 준비등을 메모해주기 위해 통화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밤12시가 되었어도 정수근, 김영재 대원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제2캠프의 조은철 대원에게 내일 새벽, 등반준비를 지시하고 나는 제3캠프가 잘 보이는 지점인 양치기마을(3,800m)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새벽4시에 제2캠프에서 하산한 정부연락관과 양치기 마을에 도착, 망원경을 이용해서 두 대원의 위치를 확인했다. 보이는 것은 스키장 스로프 같은 설면뿐이었다. 눈사태가 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은철 대원은 이날 콜 부분에 까지 도착했다. 그 위치에서는 제3캠프는 물론 정상까지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두 대원의 흔적을 찾지 못한채 탈진하여 하산했다.

이어 정원택 대원이 사고지점으로 출발하겠다고 알려았으나 말렸다. 베이스캠프에서 낙석으로 부상중이므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에서 사고지점까지는 당시 상황으로는 3일정도의 등반을 요했다. 양치기 마을과 6,150m지점서 관찰된 상황은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헬기구조 경험이 없는 정부연락관은 헬기구조조차 말렸다. 가능성도 없지만 6,000미터 이상의 구조활동은 어렵다 했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철수를 명했다.

사고 후부터는 날씨가 계속 쾌청했고 7월 30일 우리는 말없이 베이스캠프를 철수했다.

'외국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95 루프가르사르동봉원정대 계획서  (0) 2010.12.28
`92 루프가르사르 동봉 원정계획서  (0) 2010.12.28
영국의 버킹궁  (2) 2010.09.22
영국의 국회의사당  (2) 2010.09.22
영국의 윈저성  (0) 2010.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