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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발자취/2018년

사리암 부도를 찾아

by 에코j 2018. 7. 25.

1. 언제 : 2018. 6. 17

2. 어디 : 지리산

3. 코스 : 선유동계곡~사리암터~부도~도로

4. 후기

미옥이도 설악산 가버리고 종신이와 둘이서

늦은 시간까지 월드컵 축구

우리조인 독일과 멕시코전을 보는데

한국이 한게임이라도 이길지 모르겠다.


당초 이번주에는 정령치에서 바래봉까지 걷기로 했는데

미옥이가 없어서 한주 연기를 해야 될 듯하고

지난주에 이야기 나왔던

사리암부도를 보러가기로...

초반부터 계곡을 건너는 지점부터

길때문에 왔다리 갔다리 한다.

길이 아니지만 대충 고로쇠호스를 보고

어렵게 오른다. 계곡을 두번 건너고 난 후

길과 만난다.


까지수영


여름꽃인데 피기 시작하네요

큰까치수영하고는 구분할 줄 모른다.




가물었나 보다.

계곡에 물이 별로 없다.


일월비비추

나는 토끼귀같다.

종신이는 돼지코 같다나..

둘이서 심심하니 별것 가지고

우격다짐이다.


산수국

여름이 왔나봅니다.

산수국이 피기 시작했어요..






날씬는 덥지만 시원한 계곡 물 소리 들으며

오르는 다 보니 덥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네요..



이곳에서 본 계곡을 버리고

이 계곡(사리암물골)을 치고 오릅니다.

길은 거의 없고 경작지와 집터들이 아주 많습니다.


노루발풀

오랜만에 꽃을 보았네요



사리암터에 도착해서

부도를 찾기 위해 이리 저리 다녀보지만

찾을 수가 없다.

계곡으로 더 오르는데 산죽이 장난이 아니다.

오르다 보니 아닌듯 하여

다시 빽

내려오면서 종신이가 찾았다.

이제는 감도 떨어지나 보다.


참고로 사리암은 도둑 장영기 일당의 도둑들이 관군의 습격을 받고서

제2의 진지를 삼았던 곳이 사리암터 

그 곳에 가면 또 하나의 지리산의 잃어버린 불적과 지리산의 작은 역사<지리99.참고>


예종실록 8, 예종 1111일 신사 2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http://sillok.history.go.kr/ 참고                       

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진주(晉州)의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이 광양현(光陽縣)의 보고를 받고 출동하여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도둑을 보리암(菩提庵)의 옛 터전에서 발견하였는데, 도둑들이 초막 19간을 짓고 제대(祭臺)를 설치하였으며, 버려두고 간 말이 14필 있었는데 안장을 혹은 찢어버리고 혹은 불살랐으며, 한 남자를 죽였다 합니다.


구례(求禮)의 백정(白丁) 철산(哲山)이 이르기를, ‘내가 구례현감을 따라 도적과 더불어 보리암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현감이 패배(敗北)하여 퇴각하자 도적이 군사 3인을 죽이고 도망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지리산(智異山)으로 깊이 들어갈 것이므로, 신이 곧 진주로 가서 본주(本州)와 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등 고을의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화개동구(花開洞口)에 진을 치고 도둑들의 종적을 탐후(探候)하니, 도둑들은 사리암(沙里庵)의 옛 터전에 둔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진을 친 곳에서 60여 리나 떨어져 있고 산길이 험악하므로, 신이 불의(不意)에 엄포(掩捕)하고자 하여 군사로 하여금 모두 도보로 도둑들의 둔친 곳에 이르게 하니, 도둑들이 먼저 고개 위로 올라가고, 그에 앞서 여인(女人)과 치중(輜重)을 보내버렸습니다. 도둑 16인이 신의 선봉(先鋒)과 더불어 싸웠는데, 신이 30여 리를 추격하면서 모두 여섯 번 합전(合戰)하여 도둑 오덕생(吳德生)을 활로 쏘아서 잡고 그의 재산을 탈취하였으며, 도둑들이 밤을 타서 크게 부르짖으며 관군의 진에 쳐들어 왔으나, 신의 복병(伏兵)이 배후에서 쫓으며 활을 쏘니, 도둑들이 이에 도망하여서 구례로 향하였습니다. 신이 40리를 따랐으나, 식량이 다하고 행군한 지 3일에 군사들이 피곤해 하므로, 군사들을 퇴각시키고 본진의 군사로 하여금 진을 쳤던 곳에 머물러 방호(防護)하게 하고, 탈취한 재산은 진주로 부쳤습니다."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극균이 보병을 거느리고 도둑이 둔치고 있는 봉우리를 포위하자, 도둑이 그 아내로 하여금 갈고(羯鼓)를 치게 하고, 모든 도둑으로 하여금 봉우리의 아래로 나누어 지키게 하며, 관군 두 사람을 활로 쏘아 맞히고, 드디어 이극균을 핍공(逼攻)하므로, 이극균이 위로 공격하는 것이 불리하여 마침내 수리(數里)되는 곳에 물러와서 둔을 쳤다. 군졸 하나가 돌이 구르는 소리를 듣고 도둑들의 짓이라고 말하자, 모두 놀래어 도주하였다. 그때 날이 이미 어두우므로 모든 군사들이 서로 짓밟으면서 삽시간에 흩어졌다가 한참 뒤에야 〈적도들의 소행이 아닌 줄을〉 알고 조금씩 도로 모여서 행군하였는데, 한밤중에 도둑들이 진으로 돌진(突進)하여 산에 불을 놓아 자취를 없애고 도망하니, 관군이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꿀풀

점심식사후 몰골고개로 해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고

마지막에는 게곡쪽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철조망에 걸려

나오기 힘들다.

 

길에서 나오면 길에 있는 전선주번호다.


이곳이 몰골고개 들어가는 초입니다.



쑥부쟁이

가을에 펴야 될 놈이 벌써 피었으니..


며느리밑씻게


산수국


선유동계곡 초입에 있는 안내판이다


이렇게 산행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와 씻고 한숨자고

집으로..




<지리99의 글>

보리암과 사리암은 이 땅에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 지리산 화개골에 있었던 절집이다.
두 사찰의 정확한 청건연대와 폐사 시기는 알 수가 없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보리암 옛터, 사리암 옛터라고 등재한 것을 보면 두 곳의 절집들은 조선시대 초기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폐사한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사찰 들이다.


보리암터는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 모암마을 일대이다. 모암마을의 지명어원을 하동군지에서는 “주민들은 보리암으로 부르고 하동군 전지도(田址圖)에는 牟岩(모암)으로 표기되어있다. 보리(麥)와는 상관이 없음에도 보리모를 쓰서 모암(牟岩) 또는 맥전(麥田)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곳에 예전에 보리암(菩提庵) 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동군지의 소개 그대로 마을의 토착주민들은 지금도 마을이름을 보리암으로 부르고 있으나 오랜 세월의 부침 속에 잠겨버린 보리암 절집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주민들은 한 결 같이 땅을 파면 군데군데 기왓장들이 나온다고만 한다.

사리암터는 현 단천골의 지류인 물골의 하류에 위치한 폐사지로서 지형도에 사리암으로 표기가 되어져 있는 곳이다. 마을 이름의 변경과 함께 절터의 모습까지 완연한 주거지로 탈바꿈을 한 보리암과는 달리, 사리암은 절집의 자리에 길길이 자란 왕대나무가 차지하고 있어 어느 곳이 본당인지도 확인조차 어렵지만 주춧돌이 보이고 돌층계의 흔적이 남아있다. 수 천 여 평의 너른 지대에 정교하게 쌓은 축대들이며 오래된 기와와 자기 파편들도 수두룩하게보이고 부도 1기도 서 있다. 사이사이 고임돌을 끼워서 쌓은 축대들의 흔적은 지금까지 보아온 지리산 폐사지의 축대들 중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모습으로 여러곳 남아있다.

석종형의 부도는 20여 년 전 처음 사리암을 찾았을 때는 분명히 왕대밭 상류 작은 시누대숲 옆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근세에 손을 타서 지금은 무덤가로 옮겨져 있으며, 안타깝게도 부도의 주인이 누군가인지 짐작도 못할 만큼 각자의 자국만 남아있을 정도로 표면이 말끔하게 세척을 당한듯하다.  한편 사리암터에는 지금부터 30년 전 까지만도 두가구의 민가가 화전을 일구고 살았었다고 한다. 

여느 절집들이 전하는 불교관련 설화와는 달리 두 절집이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전하는 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보리암과 사리암의 단편적인 역사를 짚어본다.

조선조 예종1년(1469)에 형조 판서(刑曹判書) 강희맹(姜希孟) 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지리산 화개골에 도적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을 임금께 아뢰니, 이에 임금은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좌의정(左議政) 윤자운(尹子雲)등의 대신들을 소집하여 도적을 체포할 사의(事宜)를 의논하게 되고, 두 도가 합심을 하여서 도둑들을 꼭 체포하라고 하면서 도둑들의 소탕을 위해 관군의 지원은 물론 그에 따르는 충분한 물자를 지원하라고 교지를 내린다.

한편 도둑들이 활보하는 구례, 하동 등 지리산 주변의 각 군현 마다 “자수하는 자와 도둑에게 협종한 자는 관군이 수금(囚禁)하여 보고하면, 내가 장차 용서하겠다. 관리와 군인과 백성이 능히 도둑을 체포하는 자는 관직으로 상을 주되, 세 자급을 뛰어 올려 제수하고, 상을 원하는 자는 면포 1백 필을 주고, 천구(賤口)에게는 천역을 면제하고, 향리와 역자는 역을 면제하는 등 논공(論功)하는 등제(等第)는 다 적군을 사로잡은 것과 같이 하겠다. 혹 적과 통모(通謀)하여 관군의 일을 누설(漏洩)하거나, 혹은 도적의 체포를 태만히 하는 자는 마땅히 군법으로써 다스릴 것이니, 너희들은 각각 살피도록 하라.”고 적힌 임금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방까지 나 붙게 된다.

15세기 초반 지리산에 본거지를 정하고서 주변 관가는 물론 양가의 재물약취를 일삼으면서 활동을 한 도둑의 괴수는 전남 무안사람으로 어부출신의 장영기(張永己)라는 자이다.

따르는 무리가 일백이 넘었던 장영기 는 장건(壯健)하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지리산 화개골 보리암터에 초옥(草屋) 20여 간을 지어, 낮에는 집에 모이게 하고 밤이면 모든 도적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불을 지르고 재물을 겁탈하기도 했다.

또한 도둑들은 백주에도 거리낌 없이 길 가는 사람을 만나면 즉석에서 죽이고 재물을 탈취하니 사람들이 그의 도당이 오는 것을 보면 집안 재물을 모두 주어서라도 죽음을 모면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모은 그의 의물(儀物)이 재상(宰相)과 비등하였고, 꾀가 많고 행동이 하도 재빨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없었으며, 구례. 하동 등 인근의 관군(官軍)이 합심을 하여서 뒤를 쫓아도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이에 당시 경상 절도사 이극균은 대군의 관군을 이끌고 장영기 일당의 소탕을 위해 도적의 산채를 급습을 하니 도둑들은 어둠을 틈타 이미 도주를 한 후 이었고 19채의 산막과 제단까지 갖추어진 보리암터에는 그들이 버리고 간 말이 14필이고 말안장과 견장들이 찢기고 불에 타고 있었다. 이후 관군에게 쫓긴 장영기 일당은 보리암터에서 60리 떨어진 지리산 속 더 깊숙한 골짜기인 사리암(沙里庵)옛 터전으로 거처를 옮겨서 둔치(屯치. 진)를 친다.

이어서 임금이 바뀌어 성종 대에 이르러서도 장영기의 횡행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조정에서는 일찍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도원수 都元帥 허종(許琮) 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하여 파견을 한다.

허종이 경상절도사 이극균과 합세하여 보병들을 이끌고 도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사리암터의 봉우리들을 포위하자 장영기는 그의 아내로 하여금 갈고(羯鼓.장구)를 치게 하고, 모든 도둑으로 하여금 봉우리의 아래로 내려가서 관군을 치게 하니 허종(許琮) 또 한 한 도의 병마(兵馬)를 다스리면서도 겁을 먹고 능히 제압하지 못하고, 장영기 를 범과 같이 두려워하여 도둑들의 세력만 더 커지게 만들어서 허종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괴롭히기에 이른다.

나중에 장영기는 결국 허종의 지략으로 지리산에서 쫓기어 장흥의 바다까지 몰리었다가 허종과 장흥부사 김순신(金舜臣)이 합세하여 지휘하는 관군에게 잡히어서 처형을 당한다.


지리산도적 장영기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제하고도 조선의 역량 있는 고서들인 서거정의 ‘속동문선’. 송시열의 ‘송자대전’.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에도 기록이 되어있으며,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등장을 한다.

김종직은 지리산 산행도중 창불대에 올라서 화개골을 가리키면서,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고 기록을 했다.

한편1680년 8월에 쌍계사~칠불사를 거쳐 천왕봉을 오른 송광연의 지리산기행물인 ‘두류록’에, "삼신동 가는 길 서편으로 보리(菩提)마을이 있고,동편으로 미라(彌羅)마을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모암(보리암)마을은 장영기 이후 마을이 형성이 되어서 사람이 살게 된 듯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의 모암마을에서는 보리암 절터의 흔적은 물론  도둑 장영기 일당의 소굴흔적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도둑들이 관군의 습격을 받고서 제2의 진지를 삼았던 단천골 사리암터 그 곳에 가면 또 하나의 지리산의 잃어버린 불적과 지리산의 작은 역사하나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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